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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이래 우리나라에서 수 천년 동안 전래되어온 천년의 신비 채화칠기와 나전칠기는 뿌리깊은 전통예술이다. 1593년 성웅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 통제사로 통영에 부임한 이후 12공방을 설치하였고, 12공방중 상하칠방에서 나전칠기를 생산하므로 인하여 통영이 나전칠기를 생산하는 본 고장으로 전국에 널리 알려지면서 400여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작성일 : 18-10-10 11:55
[7월/보도자료]천년의 빛 옻칠, 현대예술로 다시 태어나다
 글쓴이 : 옻칠미술관
조회 : 3,642  


1. 천년의 빛 옻칠, 현대예술로 다시 태어나다


김선정 기자 | 승인 2018.07.31 10:17

국보 제140호 통일신라시대 나전 화문 동경

통영의 또다른 정체성,
옻칠의 본고장

“옻칠의 본고장은 통영 아닙니까?”

우리나라 옻칠예술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내로라 하는 우리 옻칠 장인들은 모두 통영이 옻칠의 중심지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30년 전만 해도 통영의 젊은이들은 수산업, 철공업, 옻칠공예 중에 한 길을 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진로선택이었다. 천혜의 바다를 접하고 있으니 수산양식업이, 배를 수리하는 철공단지가 발달해 있으니 철공업이 발달했다.

그리고 또 한 길, ‘나전칠기’로 대표되는 옻칠공예의 길이 있었다. 통영이 옻칠예술의 본고장으로 인식된 데는 통제영 12공방에서 이어온 장인들의 명맥과 항남동에 있던 경남기술원양성소를 중심으로 한 인재양성 덕이다. 일제강점기 바로 직전까지 통제영 12공방이 있었고, 나라를 되찾은 1945년부터는 나전칠기제작소가, 1951년부터 1975년까지는 ‘경상남도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가 수많은 장인들을 배출해 냈다.

명실공히 통영은 조선시대부터 전통을 잇고 있는 ‘옻칠의 본고장’이다.

경상남도 나전칠기 양성소는 현재 통영 항남동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옻칠예술과 나전칠기

전통적인 한국의 옻칠은 나전칠기와 바꿔쓸 수 있는 말로 쓰였다. 소라나 전복의 껍데기를 벗겨내 만드는 나전이 옻칠로 만들어진 각종 공예품에 장식되면서, 옻칠로 된 것에는 어디나 나전이 붙는 것처럼 인식된 까닭이다.

하지만 고대의 우리나라 옻칠은 색 옻칠로 그림 문양을 그린 칠화칠기였다. 낙랑시대의 고분(평안남도)에서 출토된 채화칠협의 옷상자는 2천 년 전의 칠기 모습과 함께 천연 방부 방습의 옻칠의 기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고려시대 옻칠나전 바둑판과 바둑알 상자.

통일신라시대까지 우리나라 옻칠은 채색으로 멋을 낸 정제칠·채색칠·건칠이 주로 쓰였다.

나전으로 장식하는 나전칠기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운 옻칠공예의 한 분야다. 옻칠을 기본적인 바탕으로 하고 신비로운 빛깔의 나전으로 장식을 한 것이 ‘한국의 옻칠=나전칠기’라는 인식을 만들어냈다.

오직 동양에만 있는 옻칠

사실 옻칠은 우리나라만의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8천년 전부터 옻칠을 사용했다고 하고, 일본은 9천 년 전부터 옻칠 그릇을 사용했다며 옻칠의 종주국임을 내세우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옻칠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중국, 일본, 베트남, 대만, 인도네시아, 미얀마, 태국 등 아시아에서 도료로 사용하는 재료다. 그리고 그 옻칠예술의 변별점으로 나전이 있다. 옻나무가 자생해 옻칠3국으로 불리는 한중일 중에, 중국은 계란 껍질을 이용한 조각기법이, 일본은 금을 사용한 마키에 기법이, 우리나라는 나전기법이 발달한 것이다.

옻칠이 나전을 포함하고 있는 셈이지만, 통영옻칠미술관 김성수 관장이 ‘옻칠회화’라는 말을 만들어내기 이전, 고려시대부터 근대의 옻칠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나전칠기가 옻칠과 동의어처럼 쓰일 수밖에 없다. 통영 옻칠의 정체성도 나전칠기의 전통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원된 12공방.

12공방에서 꽃핀 통영의 나전칠기

조선이 만든 군사계획도시 통영에는 12공방이 설치되어 있었다. 군영에 설치된 이 12공방에서는 궁궐에 진상되는 갖가지 공예품을 비롯해 종이, 가마, 솥, 부채 등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이 가운데 목공품을 만드는 소목방, 금속 장석을 만드는 주석방, 옻칠을 하는 칠방 등에서 나전칠기 작품이 분업 형태로 만들어졌다.

통영 나전칠기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나전칠기의 수요가 더욱 커진 19세기 중반에는 전문적으로 섭패작업과 자개무늬를 제작하는 패부방이 별도로 설치됐다. 이로써 통영은 조선시대 관수용 나전칠기를 생산 공급하는 최대 생산기지가 됐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피살된 1895년, 통제영은 조선의 지방제도 개편과 함께 폐영됐다. 12공방에서 일하던 장인들은 제각각 공방을 운영하며 민간에 제품을 판매하는 시장을 형성했다.

그로부터 15년 뒤 일본은 강제로 우리나라를 점령했다. 일제는 12공방 후예 나전장 10여 명의 공방이 있는 통영에 대형나전칠기공장을 여럿 설립했다. 통영나전칠기주식회사, 통영칠기제작소, 고우조다 나전칠기제작소 등은 일제가 설립해 수탈의 도구로 사용한 곳이지만, 통영을 나전칠기 명산지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게 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옻칠의 명소를 만든 통영 출신의 김봉룡 장인.

일제강점기에 희망을 이은 통영의 장인들

통영의 중요무형문화재 제54호 끊음질장 故 송주안 선생은 신기에 가까운 곡선 끊음질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아들 송방웅 선생은 1959년 아버지인 송주안 선생에게 사사받아 최근까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으로 활동했다. 80년대에는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대통령상, 장관상 등을 수상한 바 있고 1990년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끊음질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대를 이어 통영의 장인으로 전통문화를 계승한 것이다.

통영에서 대를 이은 송주안(오른쪽), 송방웅(왼쪽) 장인.

통영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나전칠기를 배운 일사 김봉룡 선생은 청년시절(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장식공예품박람회에 대화병을 출품해 은상을 수상했다. 1927년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우량공예품전에서는 금패를 받기도 했다. 

1967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나전장으로 지정되었고, 서라벌예술대학에서 나전칠기공예를 가르쳤다. 1969년에는 옻의 산지로 알려진 강원도 원주로 이주, 나전칠기·이조목기연구소를 설립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김봉룡 선생이 발자취를 남긴 원주는 선생으로 말미암아 옻칠공예 문화를 꽃피웠다.

경남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

6.25동란 기간인 1951년, 2년 과정의 ‘도립 경남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가 통영 항남동에 설립됐다. 나전칠기의 제작기술교육뿐 아니라 디자인교육도 하던 인재의 산실이었던 이 양성소는 11년간 이어오다가 1962년에 충무시(현 통영시)로 이관, ‘충무시공예학원’으로 8년간 존속했다. 본과 3년, 연구과 1년의 교육기관인 ‘충무시공예학원’은 1971년부터는 ‘충무시종합공예연구소’로 변경해 1975년까지 이어졌다. 11년간 양성소에는 입소자 429명, 전 과정 공식 수료자가 82명이었고, 공예학원은 8년 반 동안 210명이 입학해 공부했다.

이곳에 기술강사로 부임해 후학을 가르치다가 1956년 부소장(소장은 도지사)으로 임명된 이가 바로 김봉룡 선생이다. 이 양성소에서는 서양화가 이중섭이 2년 동안 데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통영에서 옻칠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전통의 현대화에 앞장서고 있는 통영옻칠미술관의 김성수 관장도 바로 이곳 경남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 졸업생이다. 김성수 관장은 김봉룡 선생에게서 나전을, 이중섭 화가에게서 데생을 배웠다.

1925년,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장식공예품박람회에서 스승이었던 전성규 선생이 동상을 수상하고
제자인 김봉룡 선생이 은상을 수상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다.

잃어버린 전통 옻칠

빛과 그림자는 항상 공존하기 마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현대나전칠기는 산업화와 함께 죽음이 시작됐다. 1980년대 초, 통영의 나전칠기업소 수는 200여개에 달해 ‘통영은 한 집 건너 나전칠기공장’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그 호황은 벼랑으로 가는 길이었다.

6.25이후 먹고살기에도 빠듯한 우리 살림에서는 고비용 저효율의 옻칠을 사용한 전통공예가 설 자리가 없었다. 천연옻칠의 생산은 중단되었고, 그 자리를 화학옻칠인 캐슈가 차지했다. 가공이 쉽고 값이 싼 캐슈에 나전을 이용한 문양을 붙임으로써, 너도나도 값싼 자개장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됐지만 우리 옻칠공예의 가치는 급락했다.

빨리빨리 모양만 비슷한 작품을 만들어내야 하던 그 시절, 우리는 옻칠만 버린 게 아니었다. 재료도 건축용 합판을 사용하고 제작과정에서도 천바르기를 생략했다. 밑칠에는 눈속임하기 좋은 호분을 사용했다. 궁궐과 고관대작의 가정을 중심으로 작은 소품 위주로 만들어지던 옻칠공예품이 1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에 장롱과 대형가구로 생산돼 유통됐다.

하지만 이 가짜 옻칠 제품들은 밀폐된 아파트가 새로운 주거공간으로 등장하면서 본색이 들통났다. 소비자들은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자개장’을 버리면서, 우리 옻칠에 대한 인식도 버려 버렸다.

경남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 3회 졸업사진. 2번째 줄 왼쪽 첫번째가 통영옻칠미술관의 김성수 관장이다.

자개장이 아닌 옻칠예술

“우리 전통옻칠을 버릴 수는 없다.”

수천 년을 이어온 옻칠에 대한 복원 운동은 예술계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옻칠의 본고장인 통영에서는 김성수 관장이 ‘통영옻칠미술관’을 설립, 옻칠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우리 전통옻칠을 현대화하고자 모든 열정을 쏟고 있다.

통영옻칠미술관 김성수 관장.

옻의 원산지인 원주에서는 해마다 ‘옻칠공예대전’을 열어 옻칠공예 인구의 저변확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상주에서는 ‘지천아트센터’를 개관, 나무가 아닌 종이로 옻칠을 현대에 되살려내고 있다.

물질만능주의가 무너뜨려버린 옻칠을 살려내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우리 전통문화를 살리고 있다.

한려투데이가 옻칠예술에 관심을 갖고 기획특집을 마련한 이유는 어떻게 우리의 소중한 전통인 옻칠을 오늘날 되살릴 수 있을까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인 이번 기획취재는 2차대전의 포화 속에서 옻칠예술을 지켜낸 일본의 옻칠예술과 한국의 옻칠예술을 살펴, 한국 옻칠예술의 본고장인 통영이 할 일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 본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통영옻칠미술관에서는 전통을 현대에 되살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은 2016 국제현대옻칠아트전 개막식.
통영옻칠미술관의 기념품판매장.
원주로 떠나기 전 김봉룡 선생이 통영의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김선정 기자  64440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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